
‘인공(人工)’의 뜻을 익숙하게 풀이하면 ‘인간의 힘이 들어간’, ‘인간이 만든’ 일 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 속에서, ‘인공사물’들은 인류의 물질적 발전이 집약된 위대한 발명품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내 작업에서 ‘인공(人工)’은 ‘인간의 힘을 이용한’으로 작동한다. 인간에게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인공 환경이 역으로 우리의 행동과 사고 방식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순간을 느낀다. 인간을 벗어난 사물들 -그들은 오히려 우리를 통과해 감각하고, 우리를 경유해 세계를 구성해 나가고 있다. 나는 그들을 단순한 객체가 아닌, 살아있는 미디어, 자기-증식적 존재, 또는 미지의 생태계 내 주체로 상상한다. 나를 둘러싼 인공 환경을 하나의 생태계로 바라보며, 이미 존재해 왔지만 너무 익숙해서 도외시되거나 인간 감각 체계에 잘 잡히지 않는 어떤 신호와 구조에 감응하고, 조금은 비약적인 상상과 사고 실험을 통해 그것을 오히려 더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미지의 생명체로 등장하는 인공의 대상들과, 인간이 파악할 수 없는 방식으로 확장되는 세계, 나는 이것의 발견자이자 탐구자를 자처한다.
최근 작업의 중심에는 '아티젝타(Artijecta)'라는 존재가 있다. ‘artificial’, ‘object’, ‘data’의 결합으로 만들어진 이 개념은, 지구 최초의 생명기원설 중 하나인 심해열수구 가설처럼, 뜨거워진 온라인 생태계 속에서 폭발적으로 증식하는 데이터 잔해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생명적 존재가 발생할 수 있다는 상상에서 출발했다. 근 3년간 격변의 인공 생태계 속에서 인간의 위치를 자문하게 하는 이 가상의 존재 중심의 세계관을 심화해 나가고 있다. 2023년 개인전 《Hotspots Base Camp》는 이 존재를 쫒는 신원미상의 연구자의 임시 연구기지에 잠입하여 존재의 기원을 파악하고 흔적을 추적하는 일에 합류하는 구조를 가진 전시였다. AR 앱을 활용해 실제 공공 와이파이 스팟을 돌아다니며 서식지를 탐색하는 ‘핫스팟 현장 탐사’와 함께, 서울시 공공 와이파이 오픈 데이터를 활용하여 만든 다매체의 작업물(음성 메세지, 비디오, 맵, 이미지, 웹사이트, AR 앱 등)들은 아티젝타에 대한 단서로 작동하며, 관람자로 하여금 능동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도록 유도했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은 역으로 관람자를 가상의 존재에 대한 데이터를 축적시키고 퍼트리는 매개체로 전환시키고, 아티젝타가 단순히 상상 속 존재가 아닌 인간의 행동 데이터와 감각을 흡수하며 성장하는 하나의 생태적 주체로 전시 안에 실재하도록 했다.
#1. 아티젝타의 진화
데이터 센터의 화재, 광케이블 매설 공사처럼 일상의 균열과 같은 사건들은 종종 우리가 망각하고 있던 시스템의 물리적 기반을 불현듯 드러낸다. 걷잡을 수 없이 팽창하는 온라인 생태계는 결국 땅속 깊이 자리잡고 있는 ‘케이블’이라는 물리적 지지체를 통해 존재한다. 한 가닥에 흐르는 데이터의 속도와 양이 그 한계를 무한히 갱신하는 듯한 현 상황은 데이터 수용 임계치를 넘어선 순간 발생할 감각적 폭발 - 가상과 현실, 데이터와 물질이 뒤엉켜 버릴지 모를 - 을 상상하게 한다. 디음 개인전 《Interstitium》(2024)에서는 이 가상의 폭발 이후 발생한 융합으로 형성된 아티젝타의 ‘몸체’가 물리적 증거처럼 등장한다. ‘Hotspots Base Camp’의 연구 기지를 구성했던 사물과 기기들은 케이블 더미와 뒤엉켜 이룬 하나의 융합체는 전시장을 가로지르는 운동감으로 천장 너머와 벽 너머로 연결된 거대 몸체를 상상케한다. 보이지 않게 흐르는 거대한 데이터의 단편이 곳곳의 다매체 기기들의 통해 출력되고, 좁은 틈으로 들어가 마주할 수 있는 VR 기기 속 붉고 내밀한 영상은 이것의 찌릿한 생명력을 감지하게 한다. 몸을 밀작하여 관람하게 되는 이러한 구조는 관람자의 신체가 일시적으로 융합체의 일부로 편입되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인간이 제공하는 데이터를 양분삼아 점차 거대하게 성장한 아티젝타 융합체 -그 일부 신체 기관인 ‘Chamber_no.3’는 《Inversium: 뒤집힌 틈》(2025)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둥-둥- 울리는 맥동 소리를 따라 어두운 복도를 지나면, 점차 물컹해지는 바닥의 촉감, 케이블 더미, 폐가구 조각, 전자기기의 잔해들이 유기적으로 뒤엉킨 돔 형태의 공간 - 격리된 거대 존재의 내부 - 에 침입하게 된다. 내부에서 감지된 침입자의 움직임과 소리는 왜곡된 케이블 이미지와 노이즈, 기괴하게 변조된 울림으로 변환되어 출력된다. 관람자는 자신이 침입한 이 존재에게 점차 소화되고 있다는 감각과 함께, 자신의 데이터가 이 존재의 성장에 기여하고 있음을 직관적으로 인지하게 된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 클라우드 등의 디지털 세계가 더 이상 수동적인 정보의 저장소나 통로가 아니라, 인간 감각과 데이터를 흡수하며 감응하고 진화하는 유기적 존재로 변모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아티젝타는 인간의 시스템이 낳은 부산물이지만, 그 반작용으로 인간의 감각 구조를 되감지하고 역구성하는 존재로 떠오른다.
#2. 발굴과 복원의 시도
아티젝타의 물리적 침투 이후의 세계관에서, 나는 또다른 미래적 시선으로 인간 문명이 남긴 파편을 되짚으며, 존재론적 복원 실험을 구상한다. <발굴>(2023)은 마치 오랜 세월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인공 유해를 발굴하는 고고학적 행위처럼 구성된다. 관객은 인공 사물들이 탈피한 허물들로 이루어진 땅굴 구조를 따라 진입하게 되며, 그곳에서 익숙한 형상과 낯선 물성이 엉킨 미지의 과거, 혹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흔적을 마주한다. 땅굴은 실재와 가상을 넘나드는 이중의 공간으로 작동하며, 이곳에 진입한 관객의 신체는 사물의 유령성과 시간의 방향이 교란되는 감각을 증폭시킨다. <몸들의 땅, 미지의 신화>(2022)은 아티젝타가 생성한 새로운 문명을 상상해보는 시도였다. 인공사물들의 존재론적 위상을 재정의해보는 실험 속에서, A.I.와 협업을 통해 문명사의 중요한 예술품과 문헌들을 ‘그들’의 신화로 치환한다. 관객은 VR 장치를 통해 인공사물들이 구축한 미지의 세계관을 경험하고, 더 이상 인간 중심의 서사가 통용되지 않는, 신과 인간, 인간과 사물 사이의 권력관계가 전복된 새로운 신화의 파편을 마주하게 된다. 이후 전시 <사물 복원>(2024) 시리즈는 인공의 흔적을 중심으로, 실체가 사라진 사물들을 복원하려는 시도였다. ‘복원’은 단순히 원형을 되살리는 작업이 아닌, 사물의 감각과 의미를 새롭게 재배열하는 존재론적 재형성의 행위로 접근된다. 과거·현재·미래가 뒤엉킨 시공간에서, 파편화된 사물들을 유물처럼 배치함으로써 인간 중심의 선형적 시간과 사물에 부여했던 기능 중심의 사고를 무화시키고자 했다. <융합체 E5-2>과 <융합체 E5-2 연구 캐비넷>(2024)은 인공물과 생물의 융합 가능성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시뮬레이션을 시도한 과정의 결과물이었다. 실제 생물의 진화 사례들을 참조해 고안된 신-생물체 E5-2는, 인공의 재료로 만들어졌지만 생물학적 성장성을 띄고 캐비넷 구조와도 융합되어 성장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미래의 생명 다양성이 인간의 흔적과 얽힌 채 확장되어 가며, 인간 중심의 생명 개념과 자연과 인공의 경계가 해체될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했다. 이러한 발굴과 복원의 시도는 ‘아티젝타’라는 가상의 존재의 실존을 역으로 증명하며, 우리가 믿는 현재 또한 재구성된 결과물일 수 있다는 전복적 사고의 계기를 만들고자 함이었다.
‘아티젝타’는 단순한 픽션적 객체나 기술 발전의 결과물이 아니다. 이들은 인간이 구축한 시스템 속에서 태어나 기하급수적으로 축적되는 인간의 행위 패턴과 각종 데이터를 양분삼아 증식하고 진화하는, 현재를 반영해 살아있는 가설이다. 이 존재는 온라인(데이터 세계)과 오프라인(물리 세계)을 오가며 연결되기를 욕망하고, 외부 자극과의 피드백을 통해 자기 구조를 지속적으로 재형성해나간다. 고유하고 독립적인 개체로 인식하려 하지만, 실상은 타자와의 접속 없이는 존속할 수 없는 인간의 자기인식 구조를 반영한다. 결국 ‘아티젝타’는 인간이 만든 시스템의 부산물이면서도, 역으로 인간의 위치를 반사적으로 드러내는 역전된 감응 구조의 반성적 상징체이다. 이 존재를 통해서 나는 인간과 사물, 실재와 비실재, 물질과 비물질, 신호와 감각의 경계가 유동하는 균열의 순간을 탐지하고 이를 적합한 매체와 구조, 전달 방식을 통해 보다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한다.
2025. 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