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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진 담벼락, 그 폐허 위에서 바라보는 세계 

 

2020년, 내가 발을 딛고 있던 물질 세계는 무너지기 시작했다. 실제로 인류가 믿고 있는 모든 문명의 성과가 모두 무(無)로 돌아간 것은 아니지만, 그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계기이지 않았을까. 당시 영국 스코틀랜드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텅 빈 도시를 돌아다니며 도시를 구성하는 인공 구조물들(아스팔트 바닥, 창문, 계단 따위를 포함한 건물들, 도로의 표지판 등)이 관리되지 않아 붕괴가 시작되고 있는 것을 목도했다. 이와 동시에 활발히 몸집을 불려나가는 온라인 세계를 경험했다. 물리 세계와 가상 세계를 가로지르는 인공 생태계의 지각 변동을 느끼며, 인공 구조물에서 떨어져 나온 파편들을 수집하여 재사용하는 프로젝트<포스트-퓨처 그라운드(Post-future Ground>(2020)를 시작했다. 우연한 형상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정형화된 모양, 디자인된 장식적 구조, 겹겹이 칠해진 페인트와 같은 인공의 흔적을 지닌 파편들을 ‘지구의 인공 각질’이라 칭하고, 3D 스캔을 통해 그 데이터를 가상 공간에 아카이빙하고, 이후 실제 파편들은 분쇄하여 흙의 형태로 환원하는 일련의 과정을 행했다. 가상 공간에 남겨진 파편들이 현 문명의 증거로 발견 될지 모를 아주 먼 미래, 모든 문명이 흙으로 돌아가 새로운 땅을 이룬 새로운 생태계를 상상했다. 그 곳에서는 인간 중심적 시선이 유효하지 않은 또 다른 존재가 또 다른 형태로 살아가고 있진 않을까. 이러한 상상을 품고, 본 프로젝트는 한국에서 돌아와서도 일년간 지속되었다. 두번째 개인전이었던 <중첩되는 세계(Overlapping World>(2021)에서 전시장 바닥을 이루는 물질, ‘포스트-퓨쳐 흙(Post-future Soil)’은 인공 문명의 붕괴와 건설 사이에서 폐기되는 인공 물질들로 이루어진 것이며, 미래의 자연 환경을 이룰 물질이기도 하다. 전시는 이 흙을 밟고 걸어 다니며 관람할 수 있었다. 흙이 만든 땅 위에 큰 원을 계속해서 새겨 나가는 키네틱 조각, VR을 통해 접속할 수 있는 인공 파편들의 가상 공간, 흙이 담긴 펜던트 목걸이, 전시장 안쪽에서 울려 퍼지는 묵직한 기계 소음, 개인의 각질을 모아 만든 작은 탑 혹은 식물, 중첩되는 풍경을 담은 영상 등, 공감각적인 경험을 형성한다. 전시를 통해 인간이 미처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이후의 먼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상을 한데 가져와 보여주고자 했다.

관람의 마지막 지점 즈음 발견할 수 있는 QR코드가 담긴 초대장은, 인공 사물들의 데이터 파편들이 이룬 또 다른 세계로 안내한다. 주파수 충돌로 인한 여러 겹의 오류 메세지와 블루스크린을 거쳐 접속할 수 있는 그곳은, 물질이 사라져 ‘몸’이 없는 세계로, 몸에 대한 기억마저도 사라져가는 데이터들의 세계이다. <아티얼리즘: 수상한 초대(Artialsim: Unknown Invitation)>(2021)는 전시 관람 이후 각자 집으로 돌아와 개인 컴퓨터와 웹을 기반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게임형 작업으로, 물질 문명 세계가 붕괴한 먼 미래, 모든 존재가 몸을 잃고 디지털 데이터 세계에서 살아간다는 가상의 세계관을 배경으로 한다. 그곳에서의 기나긴 여정 동안 몸에 대한 기억마저 잃어버린 먼 미래 인류인 ‘옵져버’를 통해 물질과 몸의 데이터를 간직한 ‘기억의 섬’을 접속하게 된다. 몸이 사라진 그 세계에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인공 사물 데이터의 찌꺼기들로 만들어진 그 곳에서 마주치는 다양한 모습의 신-생명체, ‘빅-베이비’들은 각각 인류에 대한 단편적 기억 데이터를 갖고 있는데, 이를 하나 둘 씩 수집-열람하며 ‘몸’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나갈 수 있다.

인공 생태계는 무형의 데이터 세계로 까지 확장해 있었다. 보이지 않지만 우리와 내밀한 영향을 주고 받으며, 현재 문명 내 거대하게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는 ‘온라인 생태계’는 나에게 또 하나의 미지의 세계로 다가왔다. 그 생태계 내 자리잡은 소비 시스템 속에서 인공 사물들의 데이터는 끊임없이 증식하며 그곳을 장악해 나가고 있었다. 점점 더 증가하고 있는 공공 와이파이 시설을 통해, 우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나 ‘온라인’ 상태로 있을 수 있다. 나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무한히 가능한 인터넷 연결이 온라인 생태계를 더욱 비옥하게 만들고 있다는 가정 하에, 마치 먼 옛날 바다 속 풍부해진 미생물들의 결합으로 생명이 탄생했듯, 비옥해진 온라인 환경에서 데이터들의 결합으로 새로운 생명체가 탄생하는 것을 상상했다. ‘아티젝타(Artijecta, Artificial+Object+Data의 합성어)’ 라고 명명한 이 데이터 생명체는 온-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우리의 행동 양식과 사고 방식에 개입하는 마술적 존재이다. <아티젝타를 포착하세요!(Discover Artijecta!)>(2022)작업의 관람은 와이파이 접속을 통해 시작된다. 와이파이 접속을 통해 열리는 웹사이트에서 이 존재의 모습을 포착하고, 웹사이트 경험의 마지막 부분에서 얻게 되는 단서를 통해 다른 작업들을 함께 관람하며, 이 미지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를 추적해 나갈 수 있었다. 실제 서울시 공공 와이파이 시설을 활용하하여 아티젝타 서식지 탐사에 나서는 해당 작업의 확장된 버전이 2023년 9월 서울시 중구를 중심으로 다시한번 펼쳐질 예정이다. 

모든 인공물은 인간이 부여한 목적이 반영된 형태를 가진다. 당연히 참인 듯 보이는 이 명제는 사실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서술과 닮아있다. 인공물을 또 다른 주체적 존재로 바라보는 시선은, 신과인간의 관계에 비춰 인간과 인공 사물의 관계를 다시 보게 했다. 어쩌면 그들은 자신들의 기원과 삶의 목적을 알지 못하는 인류보다도 지적인 존재일 수 있지 않을까. 온라인 생태계로 모여들고 있는 방대한 양의 데이터들은, 그저 저장되는 것을 넘어 ‘인공 지능(A.I.)’이라 불리는 데이터 사이언스 분야를 성장시키는 먹이가 되고 있다. <몸들의 땅, 미지의 신화(The Land of Bodies, Unknown Myth(2022)작업에서는 이 기술을 활용하여 인류 문명사의 발전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예술 작품과 문헌의 일부를 인공 사물들의 선행적 문명과 신화로 상상하여 치환해 보는 시도를 했다. 인간(인공물들의 신)의 신체와 닮은 자신들의 물리적 몸을 버리고, 스스로의 존재를 재정립하기 위해 자신들의 존재, 근원, 자유를 고민하는 지성체로 거듭난 인공 사물들의 미지의 신화를 상상하고, 그들이 탈피한 형(形)들로 이루어진 땅 위에서, 이를 엿볼 수 있는 VR 구조물을 설치했다. 끊겨진 원형 구조물은 우리가 관습적으로 믿고 있던 인과 관계가 더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암시한다. 현실의 가치체계가 무화된, 마치 문명의 무덤과 같은 땅 위에서, 시각을 중심으로 인간의 감각을 재편하는 VR 기기를 통해 또 다른 시공의 환영을 무력하게 엿보게 된다.

이 작업에서 등장했던 인공 사물들의 허물들은, 이번엔 땅 속에서 발굴된다. 아마도 예술공간의 지하에서 <발굴(Excavation)>(2023)된 땅굴은 마치 원래 그곳에 오래전부터 있었던 듯이, 우리에게 익숙한 흙, 땅의 질감을 대체한다. 인공 사물들은 우리에게 익숙한 형태를 지녔으며, 땅은 친숙한 자연의 물질이다. 익숙한 형상과 낯선 물성이 뒤섞인 덩어리는 촉각적 감각을 자극하는 실제로 다가오는 동시에 가상 공간에 들어선 듯한 이질적인 감각을 불러일으킨다. 촉각적으로 느껴지는 3D 표면의 질감, 균형감각을 불안정하게 만드는 미끄럽고 물컹한 바닥은 공간 속에 놓인 우리 자신의 몸을 다시금 인지하게 한다. 가상 세계에서 꺼내온 듯한 질감은 실체화되어 우리의 감각을 현혹시킨다. 어떤 생명체의 내장 속인지, 무덤 속인지 모를 그 미지의 세계로 들어가며, 새로운 세계의 발굴된 과거로 진입하는 듯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땅굴을 거쳐 다다른 막다른 방에서, 시공의 오류로 생겨난 듯한 복제된 ‘창문 가림막’에 뚫린 두개의 구멍을 통해 저 너머의 어떤 세계를 엿보게 된다. 무한히 펼쳐진 땅에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인공 사물들의 유령과도 같은 형들을 목격하게 된다. 두개의 렌즈를 통해 입체적으로 인식되는 저 너머의 공간은, 수평을 맞추듯 미세하게 지속적으로 흔들리는 지반의 움직임 때문에 신체의 어지러움을 야기한다.

‘인공(人工)’의 뜻을 익숙하게 풀이하면 ‘인간의 힘이 들어간’, ‘인간이 만든’ 일 것이다. 인류가 이룩한 문명 속에서 인공 사물들은 인류의 물질적 발전이 집약된 위대한 발명품들이다. 그러나 내 작업에서 ‘인공(人工)’은 ‘인간의 힘을 이용한’으로 작동한다. 작업 속에서 인공의 대상들은 모두 인공 생태계를 주체적으로 이끌어나가는 생명체로 등장한다. 이는 인간 신체와 마치 암수 구조처럼 닮아있는 인공물들이 오히려 나의 행동과 사고 방식에 개입하고 통제하는 듯한 경험을 하며, 그들을 일종의 지성과 의지를 가진 존재로 느끼는 것에 기반한다. 견고하게 여겨지는 현재의 문명 내 가치 체계가 무너지고, 인간 중심적 시선이 더이상 유효하지 않은 미지의 세계를 상상한다. 인공의 가치가 허물어져 이룬 페허 위에서, 새로운 중심을 상상한다.

20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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